소개 가이드

쿤밍에 여행하게 되면 반드시 가야 할 불상 참배 곳 8개 추천

윈난에 관광 명소가 많고 불상을 참배할 수 있는 사당도 많다. 소원을 하나 빌어보고 조만간 성취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참 놓치기에 너무 아까운 것이다. 

장소1: 동사탑탑 및 서사탑

성남쌍탑고차아, 성북천산여용파 라는 말은 명조 초기에 사근이 쿤밍의 경치를 묘사한 두 구절 시이다.  “성고쌍탑이 바로 쿤밍의 동사탑 및 서사탑라는 말이다. 현 서사탑가 동사거리 남단 서쪽의 부대 병영에 있다. 타워 옆에 원래 서사라고 속칭하는 혜광사도 있었는데 조기에 훼손되었다.

현 동사탑가 서림거리에 있는 윈난인민 출판사 옆에 있다, 밸브는 대리삼탑 중의 주탑과 비슷하고 서사탑보다 좀 높다. 두 타워는 하나가 서쪽에 있고 하나가 동쪽에 있어 멀리 마주하는 것이다. 현대화 건축물이 받쳐 주는 가운데 더 고풍스럽고 창건하게 보인다. 지금까지는 벌써 1100여 년이 됐다.

타워가 건축된 후 역대 보수해 봤다. 특히 동사탑는 원래 소재지가 현 동사거리 옆에 있어야 되었는데 청나라 도광 시기에 지진으로 무너지었다. 광서 9년에 재축한 것이다. 구기 “토박푸견, 내이어이동수백보내”를 고려했으므로, 동사탑가 동사거리에 없고 현 서림거리에 있는 원인이다. 외관이 원래 것과 같지만 남조의 원물이 아니었다.

동사탑의 높이가 40.57미터이며 13층이 있고 서기840년에 건축했다. 서사탑의 높이가 36미터이며 13층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동사탑 꼭대기에 있는 네 마리 “금계”가 옛날 바람이 많은 봄과 겨울 시절에 “꼬끼오”라고 운다. 그 소리가 가까이에든 멀리에든 다 들린다. 고찰에 따라, 이 네 마리 “금계”가 얇은 동판으로 제작한 것이고 높이가 2미터이다. 입가에 양끝에 구멍이 들어 있는 동간을 물어 있다. 동관 내에 금속 리드가 있으며 “금계”의 머리, 목, 복부 속이 다 공심한 것이다. 거센 바람을 불면 “금계” 입가에 있는 동관이 복강 내 공기의 맴돌어 진동으로 인한 구성진 울음소리가 나온다. 이 때문에  “금계”의 신비한 분위기를 더해 준다. 이에 따라 솜씨 좋은 장인들의 뛰어난 기예도 보이게 된다.

두 타워가 시내에 있으니 걸어서 가도 가능하다.

입장료: 무료

교통: 3,4,62,90번 버스를 타서 금벽로 역에 내리고 나서 금벽광장 옆에 있는 서림거리에서 들어가면 된다.

 

장소2: 공죽사

쿤밍 서북 쪽에 옥안산이 있다.  10여 리 빙빙돌며 구불텅하다. 푸른 산봉이 뻗어 있고 산림과 협곡이 깊숙하며, 돌샘이 소리 똑똑 나오고 흰구름이 둘러 싸 있다. “옥안청람”, 고대에 전양육경중의 하나이다

공죽사는 쿤밍 서쪽 교외에서 7킬로미터가량의 옥안산에 있다. 여기에는 숲이 우거지고 취죽 숲이 울창하며 명성이 자자한 고찰 사당을 녹음에 깊이 은폐하게 된다. 말하는 바에 공죽사는 원나라 시기에 건축한 것이다. 쿤밍의 불교도는 불교 선종을 신봉하고 대승 불교를 전하는 것도 여기부터 시작한 것이다. 궁죽사는 청 광서 시기(1883-1890년)에 재축해 봤다. 이 고찰이 4층 3원이 있다. 정교하고 치밀하며 아주 특징이 있다.

공죽사가 제일 매력이 있는 것은 청나라 시기에 사천 민간 흙인형대사 여광수 사제 5명이 7년이나 걸려서 조소한 500 나한이라는 말을 해야 한다. 이 나한이 생동감 있고 소박하며 표정이 제각기 다르고, 사람으로 하여금 절찬하게 하는 정도로 만들었다. 그리고 “동방조작예술보고중의 명주”라고 불린다.

이 작품들은 대전 양쪽 벽(68기), 천태래각(216기), 범음각(216기)에 진열하고 있다. 상중하 3층으로 나누고 상하 2층에는 대부분은 종상이고 중간에는 주요 입상이다. 배열은 대칭 데에 신경 쓴다. 예를 들면, 좌측이 굴복시킨 용이면 우측이 항복시킨 범이다. 좌측이 구름 탄 것이면 우측이 안개 탄 것이다. 말하는 바에 조상이 너무 커서 작업했을 때 여광수가 스스로 못 해서 상하 2층 조상은 대부분이 조수를 지도하여 제작한 것이다. 중간은 눈을 들기만 하면 보일 수 있는 것이라서 지극히 중요하므로 직접 하는 것이다. 정제품도 많다.


홀로 나한 밖에 조각가가 관계 있는 인물도 설계했다. 예를 들어 하나가 머리에 스카프 걸치고 몸에 가사를 두르고 손에 용의 머리 형인 대지팡이를 든 나한이 넓고 두툼한 입을 떡 벌려 있고,  손가락을 젖혀 있는 상태로 동반자에게 다가가 낮은 소리로 인간 세상의 변화무상함을 하소연한 모양인 것 같다. 그리고 그의 동반자가 손에 법기를 들고 귀를 기울여 듣고 있다. 놀라움, 동정, 심사 여러 가지 복잡한 표정이 얼굴에 보인다. 모양이 그 마음속의 떨림을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공죽사 주소: 옥안산

공죽사 입장료: 10위안

공죽사 영업 시간: 8:00-17:00

교통: 쿤밍 시내에서 여기까지는 12킬로미터이다. 공죽사로 관람하러 오면 동풍서로에 있는 윈난 식당 및 남요 역 근처에 여행 노선 직행차가 있다. 그리고 북경로에 2번, 26번 버스를 타서 황토 비탈 정류장에서 공죽사로 가는 버스 C61, C62 갈아타서 가기도 된다.

공죽사 특히 랄림: 공죽사 관람하면 보통 나한을 센다. 문에 들어가는 첫걸음부터, 남좌여우에 의하여 자신의 나이와 같은 순번인 나한의 기쁘거나 근심하거나, 불쌍하거나 성낸 표정이 자기의 인생 모양새를 의미한다.

 

장소3: 암천사

이량현 금성마을에 누워 있는 사자의 형상 같은 산이 있다. 사람들은 복사산이라고 부른다. 오봉 벽립, 천길 되는 험준한 암이다. 암 아래 맑은 샘물이 밤낮 졸졸 흐른다. 수질이 좋고 유량이 많다. 산수가 아름답고 무성한 숲에 높게 뻗은 대나무 있으며 수려하고 아늑하다. 산수 때문에 암천산이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명산에 승려가 많다”라는 말이 있다. 원나라 지정초(약 1341년) 명승 반룡 조사가 여기 와서 이엉으로 암자를 짓고 불사 선양해 봤다. 불사를 잘 치르고 떠났다. 제자들은 조사불전을 세워 그에게 공양하고 대대로 전해 내려온다. 추후 어떤 도사는 여기가 “풍수길지”인 걸 발견했더니 여기에 들어섰다. 이리하여 암천 고찰이 불교와 도교가 공동으로 주거하고 사관 공동으로 지내보는 곳이 되었다. 

명나라 경태 년간(1450년~1456년), 즉목부 주복해라는 사람이 최초 수축한 것이고 만력간 승려 흥관이 재축했다. “암천수옥”라고하고 이량 팔경 중의 하나이다. 강희 26년(1687년), 현령 고사랑, 교유 왕좌재는 문인 읍사를 초청하여 투자 경영했다.  다락집과 정자를 수축하고 반월지를 축성했다. 암천이 이로부터 자연, 인문 환경을 다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명승지가 되었다. 함동 시기에 전활 인해 훼손되었다. 1915년 지현 전양준이 누대를 재건하고 반산정이라고 명명했다. 1929년 읍신 마운상은 모금하여 두모각, 옥황각을 재건하고 량풍정을 새로 수건했다. 대면적의 꽃과 나무를 심었으며 대규모의 마애 석각을 했다. 사원이 일신되고 제일 번영기를 맞았다. 1940년 일본 전투기가 쿤밍을 폭격했으므로 부상병 병원이 옮겨 들어가고 경물도 피할 수 없이 파손되었다. 

 

19877월 마애 석각이 이량현 중점 문물 보호 단위로 공포되었다. 19932, 현정부는 암천사의 소유권이 금성 사무소에서 가지기를 허가했다. 최근 몇 년간 사무소에서는 대규모적으로 전면적인 재건을 진행했다. 대웅보전, 천왕전, 옥황각, 복신전, 산문, 수영장 등을 새로 건축하고 대면적인 꽃나무, 잔디를 심었다. 그리고 길을 개수하고 돌 테이블과 돌 의자도 증설했다. 암천의 면모가 일신되고 옛날보다 많이 나았다. 19994월에 쿤밍 국제박물원 본부와 윈난성 관광사가 국제 박물원 관광 접대 지정 부처로 수여했다

2000년 암천사 관리 위원회에서 기념비 3개 새겼다; “전모교수저서처비석, “원가곡품명처비석,  “창진각유적비석이다. 암천사 근대의 역사적 사실을 3 건을 기재했다, 창의 있고 암천사의 문화 품위를 많이 늘게 했다.  

1994623일 전위장은 부인을 데리고 여기 와서 다시 둘러봤을 때  암견천청, 양연 맺다라고 제사해 주었다.

입장료: 10위안(힌트: 산가지를 뽑거나 분향하면 소비의 덫 조심)

암천사 주소: 이량현 금성마을 암천사

주행거리: 이량에서 쿤밍 시내까지 52킬로미터이고 이량에서 암천사까지 1킬로미터이다.

암천사 교통: 쿤밍 동역, 북역에서 이량까지 가는 버스를 타면 된다. 

 

장소4: 반룡사

반룡사가 진닝현 진성동 5 킬로미터의 반룡산에 있다. 이사당이 원나라 지정7(공원1347)에 연봉스님에게 수축한 것이다. 전설에 따라 연봉대사는 부지를 고르기 위하여 반룡산에 왔다. 산세가 웅위하고 지세가 광대한 걸 봤다. 채용된 사지가 산간에 있는 용추이다. 연봉스님은 주문을 왼 수단으로 교룡을 이사하게 핍박했다. 물이 마른 후 사당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사당이 낙성되자 신도가 날이 갈수록 많아지고 향불이 번성하다. 얼마 후 연봉스님이 좌화되어 반룡조사라는 존칭을 받았다. 명나라 초기 조원스님이 잇달아 사당을 확장했다. 경문루, 관음전 지어 사당이 기본적으로 규모를 갖추게 했다. <서하객유기>에 기록한 것에 따라 반룡사 연봉 조사, 명 숭조, 원나라 지정간 팔월 십팔일에 열반 ... ” , 현재까지 여전히 여기를 반룡회로 한다.

사 관묘우가 산세에 근거하여 건축한 것이다. 산문 내에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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